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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표류하는 개인의 생존 이야기

by 성우로그 2023. 9. 9.

검은 꽃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버티고 살아나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몰락한 왕족, 양반, 평민, 노예 신분의 고저는 역사의 흐름 앞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사람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작은 인간은 그저 살아나갈 뿐입니다. 20세기 초반 나라를 떠나 새로운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닻이 올라갔다. 갑판 위에는 마지막으로 제물포를 보려는 사람들로 계단까지 북적거렸다. 너무 오래 기다려온 출항이었다.”

 

190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서 멕시코로 떠난 1033명의 사람들은 과연 배가 닻을 올리고 출항하는 순간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멕시코 에네켄 농장주들과 4년 계약을 맺었지만, 사실상 노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4년 간 인고의 시간을 버틴 후에도 그들은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나라는 사라졌고, 한반도는 너무 멀고, 여비는 말도 못하게 비쌌습니다. 대신 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각자의 길을 선택하여 살아남고 존재했습니다.

 

“이정은 혁명군들로부터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부드러운 권유를 받았다. 혁명의 열정으로 들뜬 그들은 혁명 초기의 덕성인 우애와 연대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않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김이정과 이연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이정은 천애 고아로 태어나 멕시코로 건너와 우연히 혁명군의 삶을 살게 되고, 이연수는 몰락한 황족의 핏줄로 여성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멕시코 행을 자발적으로 선택했지만 그녀는 관념적인 곳에서 가장 세속적인 곳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녀는 윤리적인 이상적 가치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 삶에 대한 의지와 활기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독한 생명력, 그녀의 삶이 증명하고 있는 이 가치가 이 소설을 아우르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이정은 세속에서 관념의 세계로, 김이정은 관념에서 세속의 세계로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은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고 주어진 자리에서 그저 살아낼 뿐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슬픈 역사 속의 소용돌이에서 어떤이들은 멕시코로 이민을 가게 되고,, 또 다른 이들은 하와이로, 일본으로, 연해주로, 만주로 모두 자신만의 이유와 목표를 가지고 고향을 떠나 새로운 꿈을 위해 낯선 나라로 떠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민자의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단하고 어려웠으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릴 수도 있지만 그것을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 그 시기를 힘들게 버텨 낸 그들을 위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곳에 작은 나라를 세웠습니다. 국호는 ‘신대한’입니다.”

 

최후의 혁명군들은 유카탄 반도 깊숙한 밀림에서 ‘신대한’이라는 나라를 세웠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기억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슬프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잊혀진 마야 제국의 역사를 찾는 이는 있지만 ‘신대한’의 발자취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엉뚱한 곳으로 와버렸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속도와 방향을 가지고 움직이지만, 끊임없이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문득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 또한 깨닫습니다. 이렇게 표류한 김이정, 이연수, 그리고 1033명의 조선인들의 삶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고 슬프지만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와버렸지만 결코 잘못된 곳은 아니었습니다.